1월 2일

가끔 일기를 언제 마지막으로 썼나, 이제 고만 써도 되나, 어느 주기로 써야하나, 무슨 일이 꼭 있어야 써야하나, 이건 의무감인가? 고민이 든다. 일기는 말그대로 하루의 기록인데, 기록의 간격이 점점 늘어나서 이제는 새로운 일기를 쓰러 오기전 마지막으로 언제썻는지, 무슨 얘기를 썻는지 읽어보는게 새로운 일기를 쓰기전의 준비 운동이다. 마지막이 10월 말이니 내 예상보다는 빨리 쓰러 들어왔다. 두달을 넘기지 않았다.

무슨 일이 꼭 있었던건 아니다. 그런데 무슨일이 또 없던 것도 아니다. 나는 저번주에 혼자 옷을 못입는 새벽이를 보며 정말 펑펑 울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잘 나아간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새벽이와 육아는 불안을 덮고 덮는 과정인것 같아서 너무 슬펐다. 내가 너무 조급했나, 요즘 새벽이가 보여주는 모습에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한꺼번에 가졌나. 새벽이를 혼낼수 없어서 혼자서 호랑이 같은 표효를 했다. 방에 들어가서. 새벽이는 그걸 나중에 나를 놀리듯이 호랑이 포즈를 취하면서 “아빠가 어흥!! 했어” 라고 했다.

내가 울자 새벽이는 나를 안고 뽀뽀를 해줬다. 같이 울었다. 아무래도 내가 울면서 얘기하는게 나름 불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게 더 슬펐다. 둘이서 한참을 울고 마음을 추스리니 벌써 10시 반이었다. 어린이집에서 말도 없이 등원을 늦게하니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나 보다. 나중에 등원하고 집에 오니 11시였는데, 부재중이 어머니, 아내한테서 몇통 와있었다. 전화 받고 싶지 않았다. 지치면 말할 힘도 없다.

지쳤다기 보다는 슬펐다. 아니면 서글펐나. 이상하게 그 다음날 부터는 새벽이가 말도 더 잘하는 기분이 들었다.

2월 16일


아이를 사랑한다는 마음은 언제 생기는 걸까. 태어나자마자 생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새벽이와 정 드는 시간만 얼추 몇달이 걸렸다. 투명한 아크릴 박스 안에 새벽이를 위해 온힘을 다해 응원을 보낼때도, 스스로 하지 않던 기도를 새벽이를 바라보며 할때에도, 조그마한 손을 처음 만져보았을때도 부성애랑은 살짝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퇴원하고 밤새 케어하던 그 시간에도, 나는 가슴 한켠에 육아를 포장한 간호에 지쳐가는 내 인생에 대한 연민이 있었음을 고백해본다.

지금의 나의 마음은 사뭍 다르다.
새벽이의 하얗고 검정색인 눈동자와 작은 입, 귀와 머리카락을 자세히 바라보는 것. 잠든 새벽이의 손발을 만져보는 것. 나의 시선이 닿는 새벽이의 모든 순간이 나보다 행복했으면 좋겠으면 하는 마음. 나 아닌 누군가에게 나의 모든걸 보내는 느낌. 정말 내가 나를 희생할수 있겠다고 다짐이 서는 그 순간. 그게 모성애, 부성애라 불리는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아이를 사랑한다는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깊어지고 고요해지며 진해진다.

언젠가 티비에서 일기는 미래를 위해 쓴다고 했다. 매 순간 힘들때, 혹은 어떤 이유로 감정의 파도가 일때, 일기를 쓰면 그것이 객관화 된다. 고만 써야지 고만 써야지 하면서 나는 왜 계속 일기를 쓰고 있을까.

너무 힘들어 울었을때, 너무 사소해서 아무것도 쓸말이 없을때, 새벽이의 무언가가 기뻣을때, 그럴때마다 나는 일기를 썻다. 물론 그 간격은 너무 평화로운 순간들로 느슨했을때도 있고, 할말이 너무 많아 촘촘해서 다시 읽어보면 이런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며 지나왔을지 내 스스로가 너무 가여운 시간들도 있다.

이것은 새벽이와 우리가족 그리고 나에 대한 기록이다.
4월 4일

일을 할 수가 없다. 아침부터 계속 우는 새벽이와 실랑이를 벌이다 그만 폭팔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엄마가 보고싶다고 우는 새벽이를 이리 달래고 저리 달래고 하던게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간다. 어린이 집이 가기 싫은가보다 싶다가도 계속 울고있는 새벽이를 보다보면 무기력함에 정신적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울고, 달래고, 재우고 6시 40분쯤 일어 난다. 그러고 나면 틈틈히 엄마가 보고싶다고 운다. 정신적 체력의 밑바닥을 꾸준히 더 깊이 파서 받아주고 또 파고, 그만큼 받아주다가 오늘은 더이상 파들어갈 곳 조차 없어서 소리를 질렀다. 새벽이는 이걸 호랑이라고 부른다. 호랑이로 변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 자신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그동안 호랑이로 변한 순간이 대여섯번 있는데 이건 마치 내 자신의 모든것의 붕괴와도 같다. 죄없는 벽과 허공에 울부짖음. 죄 없는건 새벽이도 마찬가지지만.

이건 육아인가 간호인가. 내가 늘 3년간 해오던 육아와 간호의 경계의 모호한 무언가와 조금은 다른 느낌. 요즘에는 육아에 가까운 느낌. 그나저나 육아든 간호든 한가지만 꾸준히 했다면 덜 피곤 했겠지.

암튼 새벽이는 호랑이로 변한 나를 보고 더 크게 울었다.

피곤하진 않았지만 눈을 뜰수가 없었다. 눈이 안떠졌다. 그냥 감고 한참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아마 새벽이는 불안했던것 같다. 내 눈을 뜨게 하려고 뽀뽀도 하고 간지럼도 태우고 했다. 물론 울면서. 바닥을 뚫다 뚫다 못해 지하 3천미터 암반수까지 뚫고 들어간 내 정신적 체력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래도 어쩔수 없다. 뚫린건 뚫린거고, 새벽이는 새벽이니까. 비상전력이라도 써서 마지막 정신적 체력에 주입해 정신을 차리고 새벽이 밥을 먹이고 씻기고 어린이 집에 데려다 줬다. 가는길에 이게 화해인지 무엇이든 간에 어쨋던 울지 않고 갔다. 나는 호랑이로 변한 내 자신에 대해 또 사과하고 다음번에 울고싶으면 꼭 얘기하라고 했다. 막상 어린이집에 가니까 선생님 보고 웃고 나랑 인사하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허탈했다.

눈을 뜨고 정신을 잃는 것 같다. 오늘 아침에 호랑이가 되어버린 내가 계속 떠오르고 계속 우는 새벽이, 울다가 쉬해버린 침대, 눈도 뜨지 못하고 주저앉아있는 나와 나를 달래려는 새벽이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서 모든 것이 탁했다. 눈을 뜨고도 뭘 보는지 모르는 상태.

결국 어린이집 근처 주차장에서 한시간 가까이 아무것도 안하고 다시 집에 돌아왔다. 나는 마치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방을 휘이 휘이 휘젓고 다니다가 밥은 먹어야 겠다 싶어서 밥은 먹었다. 뭘 먹을지도 몰라서 그냥 냉장고에 있던거 때려먹고 밖으로 나갈려고 이렇게 앉아서 일기를 쓴다. 해야할 것은 있고 뭘 해야할지도 아는데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니, 눈을 뜨고도 뭘 보고있는지 모르겠는 상태라고 해야하나.

예전엔 너무 정신이 없다보니 내 정신적 체력이 무한정에 가까웠던게 아닐까. 아니면 지금, 나중에 써야할 체력을 지난 삼년에 다 가져다 쓴건 아닐까. 쉽게 회복되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너덜너덜해져서 회복이 안되는 걸까. 다 써버린 충전지 같다.

일기 쓰기를 잘 한것 같다. 조금은 기운이 난다. 이래서 일기를 쓰는 듯.
6월 1일

“너가 속썩여서 내 가슴이 쌔까맣게 타들어간다”
속이 상해서 마음이 새까맣게 될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 마음은 무슨 색일까. 얼마전 계획했던 후쿠오카 5박6일 여행을 다녀왔다. 아버지 어머니까지 모시고 간 온가족 여행이었다. 가기 전날 새벽이가 열이 낫다. 병원에 급히 대려가 강한 감기약일 지어왔다. 열이 떨어지길 기대하며 약을 먹었다. 결과는 좋았다. 열은 금새 내렸다.

약이 너무 쌧던 탓일까. 새벽이가 정신을 못차렸다. 초점이나간 눈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하지말라는 행동을 계속 했다. 그날 내 마음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마치 새벽이의 먼 미래같은 느낌. 멀지만 가까운 미래. 두려웠다. 오랜만에.

약때문일것이라 추측하고 아침한번만 먹이고 그다음 먹이지 않았다. 오기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변한 새벽이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고 오랜만에 같이 패닉에 빠졌다.

다행히 그다음 아침 8시반까지 푹 자고 일어난 새벽이는 원래의 새벽이로 돌아왔다. 그렇게 행복한 기억들로 덧대어서 여행은 마무리 되었다. 그때 내 마음은 어떤 색이었을까.

디즈니에니메이션 중 인사이드 아웃에는 여러 감정들이 색을 가지고 케릭터화 되어있다. 그런데 검정색 케릭터만큼은 없었다. 왜일까. 검정색은 말그대로 밑바닥색이 아닐까. 그래서 타들어가다보면 바닥만 남게 되는 그런 검정색.

요즘 새벽이는 부쩍 많이 달라졌다. 말도 많아졌고 조리있게 하고 요구도 정확하고 하고싶은것도 많다. 새벽이의 애교에 검정색 바닥에 노란색 마음을 한겹 덧대고, 새벽이의 웃음에 하늘색 마음을 한겹 덧대고, 새벽이와 같이 놀면서 초록색 마음을 한겹 덧대어 본다. 그렇게 검정색이 안보일때쯤 그제서야 안심한다.
7월 5일

자려고 이빨을 딱다가 생각이 났다. 오늘은 새별이가 스스로 변기에 똥을 세번이나 샀다 똥이 마렵다고 이야기를 잘 한다 문득 내가 애쓰지 않아도 새벽이가  때가 되면 스스로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뜩 내가 도움이 되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2월 6일

그간 써온 일기를 쭉 다시 읽어보며 정리를 하고 있다. 감정의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쓰러져가는 생각들을 주어담아 글로 남겼는데 나는 이걸 일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치 글로 서술한 전쟁터 같았다. 한해는 삶의 주권을 향한 투쟁기였고, 한해는 우울감에 허우적거리는 나약한 부모같았고, 한해는 걱정에서 걱정으로 점철되는 날들로 괴로워하는 글로 쓰는 고성방가 같았고, 올해는 비로소 육아의 길로 접어드는 과도기 같았다.

나는 늘 부서지고, 넘어지고, 상처가 남고, 한계치를 넘지않게 그 마지노선에서 회복을 해야했다. 여기에 남긴 글들은 그 회복을 해야만 했던 날들이었다. 새벽이를 키우며 오묘하게 다른 우리의 육아는 늘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그 간격이 좁혀지기는 하였다만, 그래도 다른 가족들과 만날때면 늘 긴장됐다.

나는 얼마나 강해진걸까. 아니면 너덜너덜해진채로 있는 걸까. 일기를 쭉 돌아보니 버틴게 용했다. 난 늘 우스갯소리로 미래의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중이라 했다. 미래에 사용해야만 할 정신력과 체력을 지금 다 쏟아 붇고 있는 느낌. 점점 수명일 짧아지는 것 같은 기분. 만에하나 그렇다 쳐도 아깝지 않은 느낌. 새벽이만 잘 된다면.

걱정은 늘 걱정으로 이어진다. 걱정을 안할려고 걱정을 하는 기분. 휩쓸리지 않게 늘 조심하지만 요즘엔 내성이 생겨서인지 휩쓸려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받아들이는 자세. 새벽이와의 시간은 늘 그랬다.

연말이다. 어린이집에 가는 중에 새벽이가 늘 보이던 식물이 안보이자 식물이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겨울이 오고 비가 오지 않고 추워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요즘에는 설명하다가 뇌에 쥐가 내리는 기분이다. 새벽이에게 설명해야 하는 건 그간 해오지 않던 새로운 재활을 하는 기분이다. 설명을 해서 한번에 흡수가 되는게 있는 반면, 무언가는 백날 천날 설명해도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다.

늘 고민한다. 고민하다보면 뇌 용량 부족압박에 시달린다. 그것은 결국 예민함으로 이어진다. 걱정과 고민은 몇개까지 뇌가 처리할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나.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살 수 있을까. 내년엔 편해질 수 있을까.
Back to Top